'국민 MC' 허참(본명 이상용)이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며 그의 마지막 방송 내용도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사망 이유는 간암이었습니다
2022년 2월 1일 간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고인은 이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허참의 마지막 방송은 2022년 1월 JTBC '진리식당'에 출연해 근황을 전한 방송입니다. 그는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당시 가장 걱정되는 건강 고민을 묻자 허참은 "이건 얘기해줘도 할 수 없는 거다. 이비인후과를 겨울만 되면 수시로 가게 된다"며 "가습기도 하나는 뜨거운 것, 하나는 차가운 것 두 개를 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입니다. 나이 들어서는 온갖 질환들이 다 온다"고 토로했습니다.
또 "아픈 것도 연쇄 고리인 것 같다"면서 "월드컵 때에는 응원하다가 갑자기 코피가 터지더라. 심했다. 병원 가서 약먹고 했는데 다 끝나고 나서 (결과를) 보여주니 소름이 끼쳤다. (대장에서) 용종도 아니고 암으로 가는 선종이 발견됐다. 간에 닿을 정도로 붙을락말락이었다. 그 이후 장 건강을 꾸준히 챙기고 있다"고 전해 많은 응원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이후 한 달 만에 사망 소식을 전해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한편 허참은 본명 이상룡으로 1949년생 올해 나이 73세 대한민국의 MC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심취하여 성우 흉내로 사람들을 웃기는 데 능했고, 학창시절 다니던 웅변학원에서 발음법과 발성법, 화술을 배우면서 우렁차고 또렷한 목소리와 재치있는 말솜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영남상고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한 허참은 이등병 때부터 부대 웅변대회에서 1등을 따는 등 두각을 나타내며 문화선전대 진행요원으로 뽑혔고 군 생활 내내 위문공연 MC로 활동했습니다.
1973년 전역 후 방송인이 되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허참은 처음엔 군대나 고향 친구 집을 떠돌면서 동가식 서가숙 하다가 중구 정동에 있는 문화방송(MBC)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친구 집에 더부살이로 정착하여 채소나 생선 배달 등 잡일로 생계를 꾸리며 방송국 부근에서 계속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이 때 성공하면 갚겠다면서 여동생이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3만 원을 빌려 서울에 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대 친구와 종로에 놀러간 허참은 당시 이종환이 운영하던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에 들렀다가 통기타 그룹 쉐그린 공연 후 행운권 추첨에 당첨되어 무대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문선대 MC 3년 경력을 살려 전혀 떨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게 보일 정도로 입담을 과시하여 무대의 가수들과 관객들을 배꼽잡게 만들었습니다.
허참의 말솜씨에 감탄한 쉐그린 멤버가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라고 묻자 허참은 "아... 기억이 안납니다" 라며 능청을 떨었고, "허 참,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는 면박에 재치있게 "아 그래요, 제 이름이 바로 허참입니다" 라고 받아치면서 클럽 안의 사람들을 전부 빵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부산 청년 이상룡이 허참이란 예명을 쓰게 된 계기였습니다.
일설에는 누군가가 허참의 진행 능력을 보고 "허 참 정말 진행 잘하는구만"이라고 말한 걸 전해듣고 예명으로 삼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허참의 재능을 알아본 이종환은 그를 쉘부르의 MC 겸 DJ로 채용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나중엔 허참 쇼 라는 자신만의 쇼를 열어 매번 쉘부르 입장권이 동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종환은 허참에게 정해진 급여 같은것은 주지 않고 숙식 제공으로 때웠다고 합니다.
결국 1974년, 쉘부르의 손님으로 그를 지켜보던 당시 MBC PD 겸 DJ 박원웅이 허참을 새 라디오 프로그램 청춘은 즐거워 MC로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계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MBC 라디오의 MC와 DJ로 활약하던 허참은 1976년 경 MBC 내 모든 프로그램의 사회자를 아나운서로 교체한다는 방침으로 일자리를 잃고 신발 장사를 하는 등 잠시 방송계를 떠났다가 TBC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이적하여 7대 가수쇼 MC로 TV 무대에 진출했고, 그 이듬해인 1977년부터 TBC의 간판 쇼 프로 쇼쇼쇼의 MC를 맡으며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MC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외에 DBS의 허참과 이 밤을 등의 MC로도 활동했습니다.
특히 1984년부터 2009년까지는 KBS 1TV와 2TV를 통해 방송된 '가족오락관'을 이끌며 최고 진행자로 오랜 기간 활약, 국민 MC 중 한 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허참은 1987년 교통사고로 한 회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자리를 지키며 '가족오락관'의 상징이 됐습니다. '가족오락관'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한때 시청률이 35%를 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허참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프로그램은 가족오락관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가족오락관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MC는 허참입니다. 그만큼 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가족오락관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뒤 가족오락관이 2009년 4월 부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 30대에 진행을 맡아서 60대에 마무리하게 된 그는 "마지막 녹화를 끝내고 나서, 한 주부 방청객이 '아저씨 잘 가요'라고 인사하는데 마치 은퇴하는 기분이었다"며 아쉬워했습니다.
가족오락관으로 최장수 MC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가족오락관이 종영된 이후에도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을 계속하여 2019년 11월 3일자로 기록을 경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내려놓을 경우 가장 유력한 후임 MC로 거론되던 인물이 바로 허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허참 본인이 2022년 사망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생전 고인과 호흡을 맞춘 후배들은 하나같이 그간 느꼈던 따뜻하고 올곧은 인품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족오락관'으로 호흡을 맞췄던 방송인 손미나는 SNS를 통해 "선생님은 6년 가까이 매주 방송을 진행하며 호흡을 맞춘 짝꿍이고, 방송 진행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롤모델이자 삼촌, 친구 같은 분이었다"라며 애도했다. 또한 "내가 아는 최고의 애처가. 의리로 정으로 똘똘 뭉친 분. 철저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프로, 후배나 말단 스태프들까지도 깍듯함과 존중으로 대하시던 인품의 소유자였다"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허망함에 눈물만 난다. 편히 쉬세요"라고 전했습니다.
오정연은 "<엄지의 제왕>에 이어 <나이거참> 프로그램을 함께하며 인연을 이어오게된 선생님은 항상 한결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 기쁨과 책임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좋은 영향을 풍기셨죠. 연세가 있으셔서 어딜 가나 어른이신데도 무게를 잡지 않고, 오히려 후배들을 배려하셨고요.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추모해 모두를 먹먹하게 했다. 성우 겸 방송인 서유리도 "같이 프로그램 하면서 느꼈던 선생님의 따스함 너무 감사했습니다"라며 추모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가족오락관>이 끝난 뒤에도 그는 <트로트 팔도강산>, <골든 힛트송> 등 음악 프로그램 MC를 맡으며 건재함을 알려왔습니다.
2003년에는 음반 ‘추억의 여자’를 발매하며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2005년 제1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TV진행자상, 2006년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누리꾼들 역시 "아직 젊으신데 돌아가시다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충격" 등의 글을 인터넷과 모바일 등에 남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한편 발인은 2월 3일이며, 장지는 경춘공원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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